‘자본과 이데올로기’ — 19–20세기 유럽의 경제.군사적 지배가 가능하게 된 배경

허진호 (Jin Ho Hur)
11 min readMay 18, 2021

식민주의, 군사지배, 서양의 번영

17~18세기 시작하고, 19세기와 20세기 초에 헤게모니 장악한 유럽의 군사지배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 기간 유럽 국가들의 전례 없는 행정·재정능력의 발전에 근거하였다.

그 과정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 16세기까지는, 유럽, 중국, 오스만제국 모두 세수가 국민소득 1~2% 수준으로서, ‘약한 국가' 수준에 머물렀다.
  • 16세기를 기점으로, 유럽은 대륙 내 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을 치르게 되었고, 이는 1800년까지 세수가 국민소득 6~8% 수준까지 증가하고, 이후 20세기에는 30~50% 수준까지 증가하게 된다.
  • 이 과정에서 유럽 국가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고, 이는 결국 오스만, 중국 등 다른 지역에 대한 식민지배로 이어진다.
  • 경제적으로는, 1750년을 전후하여 삼림 채벌로 인한 목재원료의 부족 & 영국의 풍부한 석탄 공급이 맞물려 새로운 기술 개발이 촉진되고, 이 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져 결국 유럽 중심으로 막대한 부가 창출된다.
  • 국가 간 경쟁에서 비롯된 기술 혁신과 금융 혁신은, 유럽 국가들의 재정능력과 군사능력을 더욱 강화하게 되어, 유럽은 18~19세기에 산업 경쟁력과 군사 경쟁력을 동시에 갖추고 다른 대륙 대비 우위에 서게 된다.

그 자세한 내용을 데이터와 함께 살펴 보면:

유럽 국가 세수의 변화

유럽국가 세수 총량의 변화

  • 16세기 초 ~ 18세기 말, 유럽 국가들 세수 총량 급증
  • 1500~1550년: 프랑스왕국, 에스파냐왕국, 오스만제국 연간 은 100~150톤. 영국 50톤 (인구 감소)
  • 이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경쟁 → 1700년 무렵 각각 연간 은 600톤과 900톤. 1750년대에는 800톤과 1100톤. 1780년대에는 1600톤 과 1900톤에 이르러 다른 유럽 국가들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 오스만 제국 세수 1500~1780년 150~200톤가량에 머무름
  • 1750년부터는 프랑스뿐 아니라 잉글랜드도 오스만제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 에스파냐·네덜란드보다 명확히 우월한 재정능력을 갖게 되었다 (도표 9.1)

이를 1인당 세수 기준으로 설명하면: (도표 9.2)

  • 1500~1600년 1인당 세수: 유럽, 오스만, 중국 모두 비숙련 도시 노동자 의 2~4일 노동 해당
  • 1650~1700년 유럽 국가 조세압력 강화 → 1750~1780년 10~15일 치 일당 → 1850년에는 20일 치 일당
  • 반면, 오스만 제국, 중국 1인당 세수: 1850년까지도 2~4일 수준에 머무름

총 조세 규모의 비중을 보면: (공과금, 세금, 강제과세 총액 기준)

  • 여전히 현대국가 대비 낮음 (국민소득 10% 이하). 19세기~1차대전 유럽, 미국 모두 국민소득 10% 이내
  • 1910~1920년에서 1970~1980년: 비약적 증가 → 1980년대 이후 유럽 중심으로 국민소득의 30~50% 사이 안정

근대국가의 발전

  • 세수가 국민소득 8~10%에 머무르면, 사회·교 육·보건체계(초중등 무상교육, 보편적 건강보험, 퇴직연금과 사회적 이전 등)의 재원을 조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8~10% 수준 세수 기반으로는 ‘야경국가’ 수준으로 중앙집권국가가 운영될 수 있다. ‘야경’기능의 범위는, 대규모 해외 파병, 자국내 질서 유지, 재산 보호를 위한 사법, 치안 기능.
  • (16세기까지 유럽, 19세기까지 오스만, 중국이 그랬듯이) 국민소득 1~2% 수준 세수로는 ‘약한 국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론상 국가가 통제한다고 하는 영토 전체에서의 소유권, 공공질서 준수, 재화와 인민의 보호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는 약한 국가구조를 가지게 되며, 결구구 왕권적 임무를 이행하기 위해 삼기능사회 틀에서 영주, 군인, 사제 , 지식인, 지역 엘리트들과 그 구조들에 의지하게 된다.
  • 16세기까지 유럽, 중국, 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똑같이 약한 국가로서 균형을 이루었으나, ‘대분기'를 기점으로 유럽 국가들이 막강한 재정 · 행정능력을 갖추기 시작한 이후 새로운 흐름 시작되었다.
  • 중앙집권국가 내부의 이러한 발전은 삼원사회에서 소유자사회로의 전환과 맥을 같이했고, (국가 독점의) 왕권적 권력과 ‘소유권’ 사이의 엄격한 분리에 근거한 소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발흥에 의거했다.
  • 이는, 대외적으로 유럽 국가들의 해외 파병능력에 기반한 노예제적 식민제국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유럽의 대약진

유럽 근대 국가는 2차례에 걸쳐 대 약진을 이룬다.

  • 1500~1800년 사이 주요 유럽 국가 대약진: 세수를 국민소득 1~2%에서 6~8%로 확대 → 대내적으로 소유자사회의 발전, 대외적으로 식민 사회의 발전과 병행
  • 1910~1920년부터 1970~1980년까지 두번째 대약진: 부유한 나라들 세수: 1차대전 전 8~10%에서, 1980년대 이후 30~50%로 증대. 이 전환은, 경제발전과 생활조건의 역사적 향상 + 다양한 사민주의사회 확립 가능하게 함

왜 이러한 전환이 (오스만, 중국이 아닌) 유럽에서 일어났을까?

  • 단일하거나 결정론적인 해답은 없다. 그렇지만 특별히 중요한 요인 하나는 명확해 보인다. 유럽이 비슷한 규모의 여러 국가로 정치적으로 파편화되고 그 결과 과도한 군사적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 1500~1800년 기간 중에 유럽 국가들의 재정능력을 거의 열 배로 키운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과정을 보면, 세수 증대가 이루어진 주요 단계들은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거의 영구적인 전쟁 상황에서 신병 징집과 부대 증설이 필요하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
  • 특히 30년전쟁(1618~1648년), 에스파니왕위계승전 쟁(0701~1714년), (아메리카· 앤틸리스제도· 인도의 식민지들을 놓고 유럽에서 진정 세계적인 규모로 전개된 최초의 전쟁이자 미국 ·남미. 프랑스에서 벌어진 혁명의 지형들이 만들어지는 데 크게 일조한) 7년전쟁 (1756~1763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 그 외에도 단 기간에 벌어진 수많은 국지적 전쟁들이 존재했다. 유럽 국가들은 16세기 95%의 기간이 전쟁 상태였으며, 17세기는 94%, 18세기에도 78%있다 (반면 19세기는 40%, 20세기는 54%), 1500~1800년 기간에 유럽 강국들 사이에 부단한 군사 적 경쟁이 펼쳐졌고, 전례 없는 재정능력과 수많은, 특히 대포와 군함 제 조에서의 기술 혁신의 발전을 자극했던 것이 바로 이 경쟁들이다.
  • 반대로 1500–1550년 무렵 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재정능력을 가졌던 오스만 국가와 중국 국가는 이런 유의 자극과 대면하 지 않았다. 두 나라는 1500~1800년 사이에 상대적으로 탈중앙집중화된 방식으로 거대한 제국을 다스렸다. 따라서 군사능력과 재정 중앙집중화 를 발달시킬 필요가 없었다.
  • 16~19세기 사이에 형성중이던 중간 규모의 유럽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펼쳐진 과도한 경쟁이 (오스만, 중국, 인도에서 제국으로 발전중이던 국가들에 비해) 더 강력하게 중앙집중적이고 재정적으로 발전된 특수한 국가구조로 발전하게 된 핵심 요인으로 보인다.
  • 이러한 유럽 대륙 내의 갈등 속에서의 발전이 결국 세계 다른 지역의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군사 능력으로 귀결되었다
  • 관련하여 군사력 규모의 변화를 보면, 1550년 무렵 오스만제국은 14만 명의 보병과 해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 인원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각각 8만 명 과 7만 명)
  • 이러한 균형은 유럽 내의 끝없는 전쟁이 두드러졌던 다음 두 세기에 뒤집힌다. 1780년에 오스만의 병력 수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15만 명), 반면 분명히 우월한 함대와 화력을 갖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육군과 해군은 45만 명에 달했다(프랑스는 보병과 해병 28만 명, 잉글랜드는 17만 명). 이 시기 오스트리아에도 25만 명의 병력이 있었고 프로이센에도 18만 명이 있었다 (이 두 국가는 1550년에는 군사 규모는 무척 작았다). 그 결과, 19세 기에 중국제국과 오스만제국은 군사적인 차원에서 유럽 국가들에 완전히 지배되었다.

유럽이 아시아를 넘어서는 ‘대 분기'가 일어나게 된 배경

  •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힘을 축적한 유럽이 결국, 그 이전까지 경제, 문화적으로 앞서 가던 아시아를 넘어서는 과정에 대하여, 케네스 포메란츠의 책 “대분기” 기반으로 설명하면,
  • 18세기 말 19세 기초 영국 + 유럽 산업혁명은, 거대한 규모의 원료(특히 면화) 및 에너지 자원 (주로 목재) 수탈에 기초하였음. 세계의 다른 곳에서 가 져오는 원료와 에너지 자원에 대한 수탈은 강제적이고 식민적인 조직 화 틀에서 이루어졌다
  • 1750~1800년 중국, 일본의 가장 발전한 지역과 서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은 비슷한 수준의 발전 상태에 있었음. 둘 다 매우 유사한 형태의 경제발전 형태로, 지속적인 인구성장 및 (주로 경작기술 개량 및 개간과 벌채를 통한 경작 면적의 엄청난 증대 에 의해 가능해진) 농업성장 + 섬유산업 부문 산업화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 두 가지 본질적 차이가 1750~1800년부터 서로 다른 궤도들을 만들었음: 유럽에서의 산림 벌채 제약과 잉글랜드에 풍부한 석탄으로 인해, 목재가 아닌 다른 에너지원 (석탄) 활용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이에 상응하는 기술이 발전하였다 (예: 증기 엔진)
  • 유럽 국가들의 재정능력과 군사능력은 대체로 과거에서 이어져온 경쟁의 결과이고, 국가 간 경쟁에서 비롯된 기술혁신과 금융혁신에 의해 강화되어, 유럽은 18~19세기에 국제 분업과 매우 수익성 뛰어난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 유럽은 벌채로 인해 18세기 말에 거대한 규모의 생태주의적 한계에 봉착하기 직전이었다.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덴마크, 에스파냐, 이탈리아 모두 몇백 년 동안 숲이 급속도로 사라져서, 1500년 무렵 토지면적의 약 30~40%였던 것이 1800년에는 약 10%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프랑스 16%, 덴마크 4%). 처음에는 동유럽과 북유럽의 아직 숲이 많은 지역들과의 목재 교역으로 잠시 완화되었으나,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 중국에서도 1500~1800년 사이에 점진적인 산림 벌채가 일어났으나, 중국 내의 발전된 지역과 숲이 많은 지역 사이의 정치적 상업적 통합이 더 강력하여 상대적으로 산림 벌채의 심각성이 덜 부각되었다.
  • 유럽은 아메리카의 ‘발견’, 아프리카와의 삼각무역, 아시아와의 교역을 통해 이러한 제약을 타개하였다. 북미, 앤틸리스제도, 남미의 땅을 아프리카에서 이식한 노동력을 통해 수탈하면서 1750~1800년부터 비약적으 로 발전한 섬유공장들과 식민지배자들의 이윤을 위한 원료 (주로 목재, 면화, 설탕)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 장거리 운송 항로들을 군사적으로 통제 할 수 있게 되면서 대규모로 상호 발전하게 된다. 앤틸리스제도와 미국 남부의 당시 노예들에게 공급하는 식량은 영국에서 북미로 섬유제 품과 공산품을 수출하게 되면서 충당되는데, 이 수출은 거꾸로 플랜테이션들에서 가져온 목재와 면화에 의해 가능해진다. 18세기에 노예 의복에 사용된 섬유의 1/3은 인도에서 왔으며, 아시아에서 가져오는 이러한 수입품들(직물 · 비단 ·차·도자기 등)은 대부분 16세기부터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은으로 지불되었다. 1830년 무렵 잉글랜드가 플랜테이션으로부터 가져오는 면화· 목재· 설탕은 100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 즉 영국의 경작가능한 토지 전체의 1.5~2배에 달하는 토지 수탈에 의한 것이다.

국채, 세수, 군사지출, 유럽의 지배

  • 세수 규모의 차이도 이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중국 왕조의 세수 규모는, 전통적으로 국민소득의 고작 1~2% 수준에 머물렀다. 청나라제국은 엄격한 예산 규정을 적용했다. 요컨대 엄밀하게 세금 으로 지출을 충당했으며 적자는 없었다.
  • 반면, 18세기 말 유럽 세금이 국민소득의 6~8% 수준으로 높았다. 게다가,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세금 이외에도 엄청난 국채가 전시에 쌓였다. 국가 간 분쟁뿐 아니라 기존 부채 이자의 납부로 늘어난 지출을 충당하기에는 세수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 국채 규모를 보면, 1780년경 프랑스, 영국은 국민소득 100% 규모, 혁명전쟁과 나폴레옹전쟁(1792~1815년) 이후 영국 국채는 국민소득 200% 초과하는 규모로 늘어났다.
  • 하지만, 이 끝없는 부채 증가가 유럽의 발전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고, 세금, 국채 기반으로 국가 건설, 군사적 역량을 강화할 수 있었다. 당시 국가 간의 폭력적인 경쟁 속에서 택한 방식은 국채에 의한 재원 조달과 군사지출이었으며, 이는 유럽의 세계 지배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 영국 동인도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비롯한 세계 최초 주식회사들이 창립은 식민지 팽창의 영향으로 만들어졌고, 이 회사들은 광대한 식민지에서 왕권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사병조직의 역할을 하였다. 중대한 역할을 하는 운송.보험회사가 발전한 것도 해운 수송품들을 둘러싼 수많은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당시 이러한 주식회사의 대부분이 식민지 무역 독점 또는 조세 독점에 기초하였고, 이는 생산적인 기업 활동이라기보다는 고도의 군사적 강탈에 더 가까웠다.
  • 17~18세기 유럽 국가의 과중한 국채는, 채권 발행, 주식회사, 증권 거래소 등 현대적 개념의 금융 시장 발전을 가져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유럽의 전쟁관련 국채는 금융증권화과정과 금융혁신을 드라이브하는 기반이 되었다.
  • 이러한 유럽 중심의 금융 · 무역기술의 발전은, 19세기 20세기 초 글로벌 산업 ·금융자본주의시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된 기반 시설과 비교우위를 확보하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보호주의적이고 중상주의적인 정책 전체는 영국 과 유럽의 산업 및 식민지 지배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 그 결과, 세계의 제조업 생산에서 중국과 인도 비중은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1800년 53% → 1900년 5%), 20세기 유럽의 ‘세계 지배’가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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