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이데올로기’ — 미국 남북전쟁의 배경: 산업, 경제, 인구 측면에서

허진호 (Jin Ho Hur)
5 min readMay 21, 2021
  •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는 북부 주들의 섬유산업 발전만이 아니라 영국과 유럽의 산업발전에 필수불가결한 면화 생산에서도 결정적인 중요 성을 가지고 있었다.
  • 여기서 1750~1860년 1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유럽의 산업 지배가 확실해진 기간, 엄청난 규모의 노예제도 규모를 살펴보는 것이 핵심이다
도표 6.4 미국, 유럽의 노예 수 변화
  • 1780~1790년 주요 면화 생산자 역할을 한 것은 앤틸리스제도, 특히 생도맹그 (현재, 아이티)였다. 1790년대 생도맹그 노예 반란으로 노예제 플랜테이션 붕괴 이후에 중심적 역할을 이어 받은 곳이 미국 남부이다. 미국 남부는 노예 수, 면화 생산 능력을 1800~1860년 사이에 미증유의 수준까지 밀어붙여서, 노예 수는 4배로 늘어나고 면화 생산량은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1850년대 미국 남북전쟁 전야에 유럽의 섬유공장으로 수입되는 면화의 75%는 미국 남부에서 왔다.
  • 산업혁명의 핵심이자 유럽.미국 경제 지배의 핵심은 노예제 플랜 테이션과 긴밀하게 연결된 이 ‘면화 제국’이다.
  • 영국, 프랑스는 18세기, 19세기 초에도 세계에 팔 것이 궁해서, 1839~1842년과 1856~1860년에는 중국에서 마약밀매를 하려고 아편전쟁을 벌일 정도였으나, 이 ‘면화 제국’이라는 대륙 간 산업 분업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 섬유 생산 전반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고 생산 규모를 근원적으로 바꿨으며, 마침내 19세기 후반에 전 세계 섬유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 이에 따라, 미국 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균형은 1800년과 1860년 사이 급격히 변화한다. 1800년에 미국 인구는 대략 520만 명. 이 중 거의 절반 260만 명(노예를 포함)이 남부 노예제 주들에 있었고, 다른 260만 명이 북부 비非노예제 주들에 있었다.
  • 1860년에 이 균형은 깨진다. 남부 인구는 거의 5배 늘었고 (260만 명에서 1200만 명으로 증가) 북부 인구는 7배 이상 늘어나서(250만 명에서 거의 1900만 명으로 증가), 이제는 비노예제 주들 이 총인구의 60% 이상을, 그리고 자유민의 3분의 2 이상을 점할 정도였다.
표 6.1 미국 노예-자유민 인구 구조: 1800~1860
  • 그렇지만 처음부터 북부가 남부를 향해 (인종적 평등은 고사하고) 노예제의 즉각적인 폐지를 요청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핵심 쟁점은 서부의 새 영토들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링컨과 공화당원들은 새 영토가 자유로운 공간이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이 것이 그들이 알 고 있던 발전모델이었고, 대륙적이면서 세계적인 경제 공간에 통합되면서 지니게 될 서부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함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 반면에 남부 연합은 서부의 자유주들이 커나가도록 놔둔다면, 결국 연방 안에서 노예제를 옹호하는 주가 소수파가 될 것이라 여기며 두려워했다
  • 1850년 의회에서 채택된 도망노예법으로 이전 법률보다 상당히 강화되었지만, 도주 하는 노예들은 계속 늘어 갔다. 자유주들은 이 법에 따라 공권력을 동원해 지체 없이 노예사냥꾼들을 도와 도망 노예들을 체포해야 했고 도망친 노예를 돕는 사람들을 모두 징역의 중형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들은 자신의 경제모델을 지속적으로 방어하려면 견고한 정치연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 1860년 11월 링컨은 서부의 새로운 주들로 노예제를 확장하길 거부하 는 공약을 내세워 당선되었다. 1860년 말과 1861년 초에 링컨은 새로운 주들이 자유주임을 수용한다는 점과, 남부 주에서의 노예해방이 (유럽에서 진행되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 만일 소유자들에 대한 배상이 수반되는 이 노예해방 계획이 수용되었더라면 노예제가 1880년 또는 1900년까지도, 심지어 그후까지도 연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부연합은 20세기 남아공 또는 알제리의 백인 소수파와 유사하게, 자신들의 세계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긴 다수파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분리 카드를 쓰길 원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860년 12월 분리를 선언했고 1861 년 2월 6개의 다른 주가 노예제연합에 합류했다.
  • 링컨은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했지만, 대통령 직무 수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61년 4월에 남부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항에 위치한 섬터 요새를 점령하고 연방 군대의 항복을 요구하자, 전쟁 아니면 나라의 분리 사이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 4년이 지나 60만 명 이상의 사망자(건국 이래로 미국이 관여한 양차 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이라크전을 포함한 모든 분쟁에서의 사망자 누적 총합에 해당하는 수)를 낸 뒤 전쟁은 1865년 남부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 남부연합에 의해 야기된 피해들을 감안하면 과거의 노예소유자들에게 배상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 흑인을 연방군으로 동원하기 위해 링컨은 의회를 통해 1864년 4월 미국연방 수정헌법 제13조를 채택했다. 노예들을 (그 어느 쪽으로든 아무런 배상 없이) 해방시키는 제13조는 1865년 12월에 남부 주들을 포함한 모든 주에 서 비준되었다.
  • 당시 남부 주들을 점령하고 있던 북부군은 이 기회에 수 정조항 제13조에는 흑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와 관련된 그 어 떤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1865년 초 북부군 당 국은 해방된 노예들에게 승리하게 되면 그들이 “한 마리의 노새와 40에이커 토지(약 16헥타르)”를 얻게 될 거라고 암시했었다. 이 계획이 전국 차 원에서 실행되었더라면 대규모 토지 재분배를 대표하는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약속은 망각되었다. 배상에 관한 그 어떤 문서도 의회에서 채택되지 않았고 40에이커와 노새는 북부군의 기만과 위선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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