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이데올로기’ — 삼원사회에서 소유자 사회로의 전환
유럽 각국은 18세기에서 19세기 기간동안 각각 다른 과정을 거치며 삼원사회에서부터 근대 소유자 사회로 전환되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문자 그대로 ‘혁명적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반면, 영국은 1530년 수도원 해산 및 성공회 탄생에서부터 18~19세기 영국 의회가 정착되는 과정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삼원사회의 소유 불평등 구조는 거의 그대로 유지된 채 전환이 이루어져, 그 구조는 20세기 초 벨에포크 시기(1880–1914년)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이러한 불평등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 과정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 기존 삼원사회 소유권 구조가 (일부 교회 재산의 몰수를 제외하고) 거의 그대로 유지된 채 승계되었고,
- 19세기~20세기 초 기간동안 (누진적이지 않은) 비례세를 통해 소유 구조에 큰 변화 없이 유지 및 상속이 가능한 점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으며,
- 이러한 불평등한 제도가 오랫동안 유지되는 데에는, 일정 규모의 자산 소유자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납세유권자 민주주의’에 의해 자산가들이 자기 이익 중심으로 사회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유자 사회의 형성: 프랑스의 예
프랑스 혁명기의 ‘소유권’ 이전 과정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삼원사회’에서 ‘소유자 사회’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 1789년8월4일 프랑스 국민의회는 사제, 귀족의 ‘특권’ 폐지를 전격 의결하였다. 그후 이어진 어려운 점은, 이 ‘특권’의 목록을 정하고, 그 중 폐지되어야 하는 권리와 지속되어야 할 권리들을 규정하는 문제였다.
- 권력과 소유에 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는, 기존 왕권적 권리로서 이제 새로운 중앙집권국가가 독점해야 하는 권리 (치안권, 재판권 등)과 소유권 문제이다.
- 상대적으로 명확한 경우에 대한 박탈은 바로 진행되었다. 사제 및 귀족 계급의 조세특권, 교회 십일조, 교회재산이 박탈, 몰수되었고, 영주들의 봉건적 권리에 해당하는 재판권도 국가에 귀속되어 ‘재판의 국가 독점'이 이루어졌다.
- 반면 ‘소유권'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사적 소유의 신성화' 원칙에 의해서 기존 소유권이 대체로 그대로 승계되었다. 대체적인 원칙은, “국가 재정은 시민 대표자들이 자유 의사에 의해 동의한 조세제도에 의한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하며, 소유권은 ‘사적 소유의 신성화 원칙’에 의하여 사적 개인들의 사안으로 간주”되어 기존 소유권이 대체로 승계되었다.
혁명기 입법자들 (대부분 부르주아 소유주들이거나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소유관계 전체의 문제화 전면적인 대혼란과 그들의 소유권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사태로 치닫게 될까 봐, 안정적인 기반 위에 사회를 재정 립할 수 있는 타협을 찾아냈다고 볼 수 있다.
‘사적소유의 신성화’는 기본적으로 공백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한 자연 스러운 반응이다. 귀족 권력과 사제 권력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해법으로 유지된 ‘삼원 사회’ 구조가 없어져 버린 순간부터, 사회의 안정성을 보장해줄 새로운 답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존중은, 혼돈이 확산되는 것 을 막아주고 삼원사회 이데올로기의 종언으로 인한 공백을 채워줄 새로운 초월성을 제공한다. 소유의 신성화는,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의 종언에 대한 답이다. (p155)
소유자사회에서의 불평등 구조화
프랑스혁명의 조세 재정 제도는, 1901년 누진세 도입되기 까지 아주 낮은 수준 (최대 3~4%)의 비례세제로 유지되었고, 이는 ‘사적 소유의 신성화' 원칙과 함께 기존 삼원 사회의 소유 불균형이 그대로 유지 및 강화되면서 1914년까지 극도로 불평등한 소유자사회의 전개로 이어졌다.
이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는 1901년의 누진 상속세 제정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효과들이 충분히 나타난 것은 전간기부터였고, 2차대전 이후 채택된 새로운 사회·조세재정 구조가 훨씬 더 큰 효과를 나타냈다.
1780~1914년 기간 조세 제도 구조는:
- 1790년대 조세체계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됨. (상속을 포함하는) 양도세와 직접세. 모두 (역진적인) 비례과세 원칙이 1901년까지 유지됨
- 1901년 최초로 누진상속세 제정. 1914년 누진소득세 제정. (하원에서 는 1895년 누진상속세가 가결되었으나, 상원에서 그때까지 지연시켰음)
- 상속 세율은 극도로 낮음. 기본 1%. 상속자당 100만 프랑 이상의 고액상속 대상 최고세율 1901년 2.5% → 1902년 5% → 1910년 6.5%
- 직접세 중 토지세가 가장 중요한데 (총 세수의 2/3 이상) 이 역시 비례세 유지. 1914년까지 임대가치의 3~5% (소유 가치 기준 0.2% 이하) 수준
- 결국, 보유기간 중 자산 가치의 0.2%, 상속할 때 1%의 세금 납부로 부의 상속 가능하다는 의미
- 1872년 유가증권거래 소득세 신설: 3% 단일 세율 → 1890년 세율 4%로 인상하여 1차대전까지 유지
- 총 소득에 누진세를 과세하는 종합소득세 법안은 1909년 하원 통과 이후 상원의 지속적 저항에 의하 1914년에 상원 통과. 최고 소득세율 5% 수준 불과.
- 종합소득세가 제정된 배경: 1914년 1차대전 발발 위기로 3년 병역법이 제정되고, 이에 필요한 재정 부담 & ‘국가 방위 요청’에 따라 사라예보 사건 2주후 &선전포고 2주 전 1914년 7월15일 상원에서 의결되었다. 그나마, 최고 세율은 5%에서 2%로 낮춰짐
- 최고 세율 수십% 수준 누진소득세 → 1차대전 이후 전간기에 도입됨
이 과정을 통하여 프랑스 혁명 이후의 소유자 사회가 등장하고 불평등이 구조화된 과정은 아래의 그래프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소유자 사회의 형성: 유럽의 예
영국의 예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11세기에서 20세기까지 사회 구조의 변화가 지속적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 의회은 11~13세기에 탄생하여, 14세기 상원과 하원이 분리되고 상원은 사제 계급과 귀족 계급이 대체로 양분하게 된다.
1530년 잉글랜드 헨리8세의 이혼 문제로 시작된 영국 교회 개혁을 통해 수도원 해산과 영국 성공회 탄생을 거치며 (귀족 권력 대비) 사제 권력 축소가 시작되어, 사제 권력 대비 귀족 권력 비중이 (다른 나라 대비) 높게 된다. 이는 스코틀랜드 통합 (1707년), 아일랜드 통합(1800년)을 거치면서도 계속 유지된다.
- 귀족 토지 소유를 보면, 1880년 인구 0.1%를 차지하는 7,000개 귀족 가문 소유 토지 비율 80%, 인구 0.01%인 250개 가문 소유 토지 비율 40%로서, 프랑스 혁명 직전 프랑스 귀족의 토지 소유 비율 25~30%를 훨씬 앞선다.
- 영국 상원은 460개 가문의 명문 귀족이 차지하며, 19세기 말 영국 하원도 (인구 비율 0.5% 규모의) 귀족이 75%를 차지하였다.
- 영국 귀족제는,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460개 명문 귀족 가문 (인구 0.2%), 상원 신분 없는 임명 귀족 수백명을 제외하면, ‘젠트리'라 불리는 지위, 작위, 공식 위상등 아무 것도 없는 명예 귀족 (인구의 1% (18세기)에서 0.5% (19세기))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귀족 계급 중심 구조는,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하원 투표권 확대 및 누진세 도입 과정에서 상원이 몰락하고 소유자 사회의 몰락 과정을 거친다.
- 영국 선거법의 변화: 유권자 인구 비율 5% (1820년) → 1832년 선거권 확대로 유권자 인구 14% (1860년) → 1867년 선거개혁으로, 유권자 인구 비율 30% → 비밀선거 제도 도입 (1872년) → 1884년 선거개혁으로 선거법 전국 통일 및 유권자 비율 60% → 1918년 남성 보통선거 도입
- 1880~1890년 소득 & 상속 누진세 제안 공론화되어, 1909년 ‘인민 예산’이 도입된다. ‘인민 예산'은 누진 종합소득세, 누진 상속세, 토지세 인상, 노동자 퇴직 연금 제도를 포함하여 1909년 하원에서 통과되었고, 1911년 ‘상원이 계속 거부할 경우, 상원의원을 신규로 500명 증원하겠다’는 왕실의 경고로 상원이 굴복하게 되어 입법되었다.
- 이후, 1911년 새 헌법으로 상원은 입법 권한 상실하고, 1945년 최초로 노동당 정권 수립을 통해 2차대전 이후 소유 불평등 구조의 와해가 시작되었다.
스웨덴의 예: 스웨덴과 네 신분사회의 입헌화
-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사민주의자들이, 이 당의 역사적 지도자 얄마르 브란팅 Hjalmar Branting이 총리가 된 1920년대 초부터 이어 1932년부터 2006년까지 거의 영구적으로 정부를 이끌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극도로 정교한 사회적 조세재정제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고 역사적으로 가장 낮은 불평등 수준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스웨덴을 애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평등한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스웨덴 은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심각하게 불평등한 나라였다. 어떤 면에 서는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훨씬 더 불평등했거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하 자면 불평등의 구조화가 더욱 치밀했고 소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표상과 그 제도적 구현은 더욱 체계적이었다.
- 1527년부터 1865년까지 스웨덴 군주정은 리크스다그 Riksdag라는 의회 제도로 운영되었다. Riksdag 의회는 네 신분인 귀족, 사제, 도시 부르주아, 농민 토지소유자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고, 의회 내부 의사 결정은 신분 별로 각기 이루어졌다. 네 신분 의견이 2 대 2로 대등하게 나뉘는 경우 국왕이 결정권을 가진다.
- 귀족 계급 인구 비중: 20세기 초까지 인구의 0.3~0.5% 수준 유지하였으나, 귀족 계급으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예: 1844~1905년, 스웨덴 내각 장관의 56%가 귀족
- 1865~1866: 의회는 양원제로 전환. 상원은 인구 1% 이하인 대지주 9,000명이 선출, 하원은 인구 20%의 납세 유권자가 선출
납세유권자 민주주의에 의한 불평등 구조 고착
영국의 예:
- 영국 선거법의 변화: 유권자 인구 비율 5% (1820년) → 1832년 선거권 확대로 유권자 인구 14% (1860년) → 1867년 선거개혁으로, 유권자 인구 비율 30% → 비밀선거 제도 도입 (1872년) → 1884년 선거개혁으로 선거법 전국 통일 및 유권자 비율 60% → 1918년 남성 보통선거 도입
스웨덴의 예:
- 1865~1866: 상원은 인구 1% 이하인 대지주 9,000명이 선출, 하원은 인구 20%의 납세 유권자가 선출
- 1871년 지방의회선거 예: 54개 지방행정구역에서 1명 유권자가 50% 이상의 선거권 행사. 414개 지역에서 1명 유권자가 25% 이상 선거권 행사
프랑스의 예:
- 1차 왕정복고기 (1815~1830년): 유권자는 직접세를 300프랑 이상 내는 30세 이상의 남성으로, 성인 남성 1% 이내 10만명. 피선거권은, 직접세 1,000프랑 이상 내는 40세 이상 남성으로, 성인남자 0.2% 1.6만명
- 7월 왕정(1830~1848년): 유권자:성인남성의 2%. 피선거권자: 성인남성의 약 0.4%
사족: 주식회사 의결권
- 역사적으로는, 일정 한도를 넘어서는 여러 주식을 가진 모든 주주가 동일 한 수의 의결권을 가짐으로써 사실상 의결권 수의 최대 상한선이 유지되었다. 최대주주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 여러 부문으로 나누어 고정 의결권을 운용하기도 하였다.
- 현대 보편화된 ‘1주 1의결권’ 모델은, 19세기 후반에야 대주주들의 압력 아래 제도로 정착되었다. 대표적으로, 1906년 영국 회사법 (Company Law)을 통해, 주식과 의결권의 비례배분 원칙이 주식회사에서 법에 의한 원천적 관리양식이 됨
벨에포크 시대의 소유주의적이고 불평등주의적인 근대성
프랑스, 영국, 스웨덴 모두 19세기~20세기 초 기간 삼원사회에서 소유자 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기존 불평등한 소유 구조가 거의 그대로 승계되었으며, 그 높은 수준의 불평등 수준은 벨에포크 시기 (1880~1914년 )까지 지속 상승 국면이 유지되었다.
그 결과, 벨에포크(1880~1914년) 시대는, 소유주의적이고 불평등주의적인 근대성을 띄는 시대가 되었다.
- 1880~1914년의 세계는, 진정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자동차, 전기, 대서양을 횡단 정기여객선, 전신, 라디오이 발명되며 신 기술에 의한 산업 구조의 구조적 변화가 빠르게 진행된 시기이다. 실제로 벨에포크 시기 와 21세기 초의 세계는 많은 면에서 닮았다.
- 벨에포크는, 세계가 겪은 금융·무역 세계화가 한창 시작되는 근대성의 첫 번째 시대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 소유자들의 국제금융투자 규모에 최고 수준으로, 1914년 파리와 런던이 보유한 (국민소득 대비) 국제 금융투자 총액 규모는 20세기 말에야 회복할 정도로.
- 동시에 벨에포크는 극단적인 불평등의 세계였다. 인구의 70%는 단 한푼의 재산도 없고, 1%가 전체 소유지분의 거의 70%를 점유할 정도로
벨에포크 시기 (1880~1914년)의 소유 불평등:
- 극도의 자산 불평등: 상위 10% 보유 자산 85~90%, 중간 40% 자산 10~15%, 하위 50% 자산 1~2%
- 소득 불평등: 상위 10% 소득 비중 50~55%. 중위 40% 비중 35%. 하위 50% 비중 10~15%,
특히 벨에포크 시기의 유가증권 소유 구조를 살펴 보면,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의 자산 구조 국제화, 자산 보유 형태의 근대화로 이어졌다.
- 1912년 전체 자산 중 금융자산 비중 62%. 이는 산업의 급성장과 함께 기업 보유자산과 증권시장이 중요해졌음을 의미
- 이에 따른 두 가지 결과는, (1) 상위 자산가들이 훨씬 강하게 금융 자본화됨. 1912년 자산 상위 1%의 금융자산 점유율 66% 수준으로, 벨에포크 시대 소유자 엘리트는 자본가이자 실업가인 금융 엘리트로 볼 수 있다. (2) 해외 금융투자가 1872년과 1912년 사이에 엄청나게 증가하여, 총자산에서 해외 금융투자 비중 6%에서 21%로 증가 (표 4.1)